데이비드 호크니와 가만히 서 있지 않는 것의 행복
20년간 뉴요커의 기자로 활동한 로렌스 웨슐러는 데이비드 호크니와 거의 45년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6년 호크니의 전기 회고록인 <True to Life>를 출간했다. 뉴욕타임스에 그의 추모글이 실렸는데 감동적. 그나저나 사진에 나온 스탠리와 부지를 그린 그림들이 너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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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를 처음 실제로 만난 것은 1982년, 그의 생애 한가운데이자 결국 그의 경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다.
물론 나는 오래전부터 그의 경력을 좇아왔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런던 미술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말이다(당시 영국에서 여전히 완전히 불법이었던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그토록 거리낌 없이, 신선하고 활기차게 표현해냈다는 사실은 오늘날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어진 그의 세계 편력은 로스앤젤레스 도착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그는 오랜 거주자였던 우리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다시 보기 시작하도록 도왔다. 수영장, 야자수, 스프링클러, 건물 정면, 하늘, 그리고 그 빛을!
그는 신문 사교란에 단골로 등장하는 진정한 산책자(flâneur)였고, (그의 드로잉과 회화에 사무치게 기록된) 그의 연애사는 대중의 매혹 대상이었다. 나는 그를 안다고 여겼지만, 내 선입견은 거의 전부 곧 뒤집히게 된다.
우선 느긋한 멋쟁이라는 겉모습부터. 나는 어쩐지 그가 거의 늘 파티를 즐기거나 긴 휴가를 빈둥거리며 보내는 사람이라고 상상해왔다. 그러나 정반대로, 그는 내가 만나본 가장 우직하게 작업에 매달리는 예술 노동자 중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빈둥거리는 듯한 그의 모든 이미지(생트로페, 중국, 말리부). 그는 그 내내 작업하고 있었고, 바로 그 환상을 조장하는 이미지들을 왕성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령 「비시의 수원 공원(Le Parc des Sources, Vichy)」(1970)을 떠올려보라. 프랑스 온천에서 두 줄로 멀어지는 가로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두 친구를 그린 이 장엄한 그림에는 빈 의자 하나가 곁에 놓여 있다(그 자리는 원래 그의 것이었으나, 그가 일어나 장면을 더없이 공들여 기록하느라 비워둔 것이다).
파티광 이미지에 대해서는, 사실 자신은 그렇게 자주 외출하지 않으며 외출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그는 내게 단언했다. 다만 외출할 때마다 파파라치가 몰려들었고 그들이 똑같은 나들이 사진을 거듭 재탕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집에 머물며 책 읽기를 훨씬 좋아했다. 실제로 그는 게걸스러운 독학자였고, 미술학교 교육의 상대적 협소함을 메우려 점점 넓어지는 개인 서재에 파고들었으며, 늘 자신의 최신 발견을 열변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1980년대 초는 뚜렷한 전환을 알렸다. 비시 그림, 그리고 그 전 10년간 그의 작업을 유명하게 특징지었던 일련의 생생한 이중 초상 걸작들(「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돈 바차디」, 오시 클락과 실리아 버트웰 부부와 고양이 퍼시)은 대체로 멀어지는 일점 원근법에 갇혀 있었다.
그는 그런 작업에서 사진을 연구 도구로 자주 활용했지만, 점차 사진이 제공하는 시점의 그 옥죄는 일점투시적 압박을 의심하게 되었다.
"사진은 괜찮습니다." 1982년 그 첫날, 그가 그런 '스냅' 한 뭉치(그 경우엔 폴라로이드)를 손에 쥐고 자신이 만들고 있던 정교한 포토 콜라주를 들여다보며 내게 말했다. "마비된 외눈 거인의 시점에서, 그것도 찰나의 순간만 세상을 보는 것이 괜찮다면 말이죠."
실제로 그가 당시 작업 중이던 콜라주들은(문자 그대로 수만 장의 사진을 동원하고 있었음에도) 개별 시점이 현실을 규정한다는 주장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말처럼 "그것은 세상의 실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삶에 충실하지 않은 거예요."
광학적인 것(그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의 헤게모니로부터의 그의 점진적 이탈은 그보다 몇 해 전부터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먼저 1975년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난봉꾼의 행각(The Rake's Progress)」 연출에서 정신병원을 일점 원근법으로 멀어지는 독방들의 배열로 묘사한 데서, 그리고 1980년 벽면 전체를 채운 걸작 「멀홀랜드 드라이브: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서. 이 작품은 그가 마침 인접한 집과 스튜디오를 사들인 능선 길과 그 아래 펼쳐진 도시 전체를 휩쓸듯 그려낸 것이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drive(드라이브)'는 동사였다. 호크니는 관람자를 이동하는 초점을 가로지르는 드라이브에 초대했고, 새 굽이마다 펼쳐지고 지나쳐가는 연속된 시점들을 차례로 늘어놓았다. 캘리포니아의 호크니가 맹렬한 독학자(autodidact)였다면, 그는 그 열정에 'auto(자동차/스스로)'를 넣었다. 소년들과 수영장과 빛이 그에게 중요했던 만큼이나, 어떤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전 그 자체, 곧 멈춰 있지 않다는 순전한 희열이 되어가고 있었다.
"맞아요." 몇 달 전 그의 런던 스튜디오를 만년에 방문해 내가 그 관찰을 직접 건넸을 때 그는 열렬히 동의했다. "L.A.에 온 첫 주에 나는 운전 강습을 받고, 운전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따고, 차를 샀어요!"
그 이동하는 초점은 온갖 방식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봄의 '접힌 질서(implicate order)'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매혹, 그리고 끝없이 변화하는 시점이 펼쳐지는 중국 두루마리 그림에 대한 조지 롤리의 해설 등으로 이어졌다(새 작업마다 저마다의 새 멘토가 따라붙었다).
단안적인 것으로부터의 점점 더 뚜렷한 해방은 포토 콜라주에서 뻗어 나온 작업들 전반에서 볼 수 있었다. 1970년대에 그의 절친한 친구 이셔우드와 바차디를 그린 이중 초상화로부터, 몇 해 뒤 그들의 폴라로이드 콜라주를 거쳐, 다시 몇 해 뒤 그들의 집을 방문해 그린 그림에 이르는 전환을 느껴보라.
그러나 그것은 그가 새 천년 전환기 무렵 착수한 거대한 작업에서도 드러났다. 서양 회화 6세기를 가로지르는 깊은 학술적 탐구로, 그는 이를 할리우드 힐스 스튜디오의 2층 높이 벽면 전체에 펼쳐 놓았다. 이는 논쟁적인 저서 『숨은 지식(Secret Knowledge)』으로 자라났는데, 그 책에서 그는 서양 화가들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 무려 143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부터 광학 보조 도구, 곧 곡면 거울과 투사 렌즈를 사용해왔다고 주장했고 또 입증했다고 우겼다.
이동하는 초점에 대한 그의 집착은 오페라 연출도 점점 잠식했다. 그의 뛰어난 기술 조수들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위해 그의 스튜디오 탁자 위에 미니어처 조명까지 갖춘 소형 극장을 꾸며, 빛 제어 대시보드를 제공했다. 그는 찾아온 손님 누구에게나 그것을 "운전해" 보였다.
그것은 그가 곧 실제 드라이브 연작으로 뒤집어버린 즐거움이었다. 차 트렁크에 최신 오디오 테이프 플레이어를 싣고, 그는 말리부 오두막을 찾은 손님들을 인근 산타모니카 산맥으로 데리고 나가 더없이 적절한 클래식 곡들의 토막(수자, 모차르트, 슈베르트)으로 정확히 시간을 맞췄고, 마지막 능선을 넘어 바다 쪽으로 향할 때면 바로 그 순간 해가 지고 있었다(바그너!).
회화적으로는 「개로비 힐(Garrowby Hill)」에서 그 집착이 정점에 달했다. 영국 요크셔 해안의 거점에서 죽어가던 어린 시절 절친 조너선 실버를 만나러 요크의 병원까지 오가던 한 계절 끝에 그려낸, 가슴 미어지는 그림이다. 실버가 죽은 뒤 L.A.로 돌아온 호크니는 연작의 마지막 그림에 착수했다. 매번 새로 넘어가야 했던 능선 꼭대기에서 본 풍경으로, 멀리 요크 민스터 대성당이 음울하게 솟아 있고 들판들이 역원근법으로 펼쳐진다.
당신이 지금 차를 타고 그 언덕을 넘어오는 중임이(말하자면 그것을 극복하는 중임이) 어쩐지 분명히 느껴졌다. 뒷바퀴는 정상의 한쪽에, 앞바퀴는 이미 반대쪽에 걸친 그 차를.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처럼 당신의 눈이 드라이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당신은 차 안에 있었고, 미래를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더없이 가슴 벅찬 순간 속 이동하는 초점으로서.
그러나 죽음, 곧 움직임의 멈춤은 이미 한동안 호크니 작업의 대위적 주제였다. 1982년 무렵 그 시기는 또한 에이즈가 끔찍하게 창궐하던 바로 그 시절이기도 했다. 호크니는 때로 한량, 가벼운 사람, 그리 진지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당시 그는 작업에서 에이즈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받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세상에, 그는 자기 개들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그러나 그의 첫 그림들이 그러했듯, 그는 확성기를 들지 않았다. 상황의 실상이 작업에 그저 스며들어 있었을 뿐이다. 실로 그의 작업은 죽음에 맞선 삶의, 더 구체적으로는 망각에 맞선 사랑의 끊임없는 단언이었다. 그 닥스훈트들을 보라. 더는 잠자거나 부둥켜안은 벌거벗은 젊은 남자들을 거리낌 없이 그릴 수 없게 된 순간, 그는 사랑하는 자신의 개들을 바로 그 똑같이 나른한 자세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포토 콜라주 속 몇몇 인물은 그가 그들의 마지막 다중 시점을 스냅으로 담는 동안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작업은 깊고 깊은 증언이었고, 활처럼 휜 슬픔(가벼운 손길로 그려졌을지언정)이었으며, 죽음에 짓눌리기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삶에 충실하기를 끊임없이 고집하는 것이었다(true to life, 결국 내가 그와 나눈 25년의 대화를 모은 내 책에 붙인 제목이다).
나는 그 최악의 역병 시절 어느 저녁 그가 말리부 거처의 바다를 향한 창문 너머로 그린 작은 캔버스 한 점을 떠올린다. 바로 너머에서 소용돌이치며 끓어오르는 폭풍 파도를 배경으로 섬세하게 차려진 앙증맞은 도자기 찻상. 만년의 시 「고마워, 안개(Thank You, Fog)」를 쓴 동향의 거장 W.H. 오든처럼, 호크니는 아늑함의 깊은 애호가였다. 다만 이 이미지에서 그에게 아늑함이란 혼돈에 맞서 지탱해낸 하나의 단언이자 성취였다.
같은 무렵 그의 또 다른 가상 멘토 칼 세이건이 세상을 떠났고, 호크니는 애정 어린 헌사를 만들었다. 세이건의 이름이 위에 새겨진 묘비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세이건의 글에서 특히 아꼈던 한 대목의 타이핑 원고를 끼워 넣은 드로잉이었다. 그는 그 이미지를 여러 장 복사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내게 보낸 것에는 그가 자주 하던 권유 한마디로 끝맺음을 했다.
데이비드를 그의 연애사라는 가십적 잣대로만 보려 했던 이들은, 그 단순하고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비록 어렵게 얻어낸) 단언의 힘과 우아함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삶을 사랑하라(Love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