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위원 독서 릴레이 7 : 두 발로 대지를 딛고, 함께 걷는 포용의 사회를 향하여] 이억원 금융위원장님의 지목을 받아 일곱 번째 국무위원 독서 릴레이를 시작합니다. — 알베르트 키츨러의 《철학자의 걷기 수업》
지구상에서 가장 바쁘고 경쟁이 치열한 나라, 성장의 이면에 깊어지는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곳.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대한민국의 자화상입니다. 끝없는 속도전과 물질적 가치 중심의 무한 경쟁 속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정신적 피로감과 상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이 상처받은 마음들을 위로하고, 강자와 약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선한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을지 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독일의 철학자 알베르트 키츨러의《철학자의 걷기 수업-두 발로 다다르는 행복에 대하여》는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해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걷기와 자연 속의 산책입니다.
저자는 속도를 멈추고 자연을 거니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잃어버린 정신적 가치를 회복하고, 타인과의 포용적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연대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래전부터 가슴 깊이 품어온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 하나를 다시금 꺼내 보았습니다. 언젠가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오면, 백두산 삼지연 호숫가에 작은 통나무 집을 짓고 사는 꿈입니다. 아침이면 호수에 서린 물안개를 바라보고, 낮이면 울창한 숲이 우거진 백두산 자락을 마냥 걷는 상상. 그 상상만으로도 숨 가쁜 일상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합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인간 본연의 자유를 가장 깊이 고뇌했던 장 자크 루소는 그의 유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걸어 다녀야만 명상을 할 수 있다. 걷기를 멈추면 생각도 함께 중단된다. 내 정신은 반드시 내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루소에게 전원과 자연 속을 걷는 것은 단지 휴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문명의 위선과 경쟁이 준 상처를 치유하고,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의 순수한 기쁨을 깨닫는 정신적 수행이었습니다. 우리가 물질적 풍요만을 좇으며 눈앞의 경쟁자들을 밀어내기에 급급할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자연 앞에 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연의 풍경을 내 삶으로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 비로소 내면의 평화가 찾아오고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삼지연 호숫가를 걷고 싶다는 나의 오랜 꿈 역시, 어쩌면 갈등과 대립의 현실을 넘어 영혼의 평화를 얻고 싶은 본능적인 이끌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삶의 고통과 허무에 정면으로 맞섰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훨씬 더 역동적인 문장으로 걷기를 예찬했습니다.
“가급적 앉아 있지 말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몸의 근육이 축제를 벌이는 가운데 태어난 생각이 아니라면, 그 어떤 생각도 믿지 말라. 생각이 근육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니체에게 책상 앞의 사유는 고루하고 갇힌 생각이었지만,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온몸의 근육을 움직이며 얻은 생각은 삶을 역동적으로 긍정하게 만드는 생명력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직 사회와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사유 역시 이와 같습니다. 밀폐된 집무실과 지표 중심의 보고서 속에 갇힌 정책은 국민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직접 민생의 현장을 걷고, 자연과 인간이 숨 쉬는 길 위에서 근육을 움직이며 고뇌할 때, 비로소 약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강자의 책임을 일깨우는 살아있는 정책이 태어납니다.
키츨러의 메시지, 그리고 루소와 니체의 철학이 교차하는 지점은 명확합니다. 물질적 가치에 치우친 고속 성장은 사회의 양극화를 낳고 선한 공동체를 해체하지만, 정신적 가치를 병행 추구하는 느림과 성찰의 걷기는 우리 사회를 다시 연결해 준다는 점입니다. 걷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기에 길가에 피어난 작은 들꽃을 볼 수 있고, 내 곁을 걸어가는 이웃의 피로한 어깨를 살필 수 있습니다.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걷기의 철학이 스며들기를 소망합니다.
속도와 효율성만을 앞세우기보다,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고 함께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상생의 걸음걸이가 필요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로운 공존과 미래를 구상할 때도, 대결의 서사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는 ‘길 위의 사유’가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