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당금이든 파업이든, 결국 시장이 네러티브를 만들 때 가져다 쓰는 재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걸 두고 “코스피가 블룸버그 기사 때문에 빠졌다”고 단정하는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원인과 촉매를 구분하지 못하는 해석에 가깝죠.
블룸버그 기사는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에 가깝습니다.
이미 시장은 단기간에 많이 올랐고, 그 안에는 차익실현 욕구, 외국인의 포지션 변화, 한국 시장에 대한 낮은 신뢰도도 있겠고, 정책 언어에 대한 불확실성이 쌓여 있었을 겁니다. 거기에 뉴스 하나가 옳다쿠나하고 나온거고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정보의 비대칭성이라고 봅니다.
뉴스 원문까지 찾아서, 실제로 어떤 단어가 쓰였는지, 그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한국어 발언의 뉘앙스가 영어로 어떻게 번역됐는지 확인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국어 맥락에서는 “정책 방향에 대한 긴 설명”이었던 문장이, 영어 헤드라인에서는 “주주환원 리스크”나 “노동 리스크”처럼 소비될 수 있습니다.
펀더멘털이 하루 만에 바뀌었을까요? 아니죠.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하루 만에 무너진 것도 아니고, HBM 수요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AI 사이클이 끝난 것도 아니고, 한국 거시 환경이 갑자기 뒤집힌 것도 아닙니다.
바뀐 건 기업의 가치라기보다, 그 가치를 둘러싼 해석의 언어죠.
(계속해서)
투자든, 경영이든, 정치든, 연애든, 협상이든 결국 기세의 게임인 것 같습니다.
네러티브는 이 기세를 만드는 도구예요. 좋은 이야기가 깔리면 사람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면 결과가 나오고, 결과가 나오면 "봐라, 맞잖아"가 되면서 기세가 자기 강화를 시작합니다.
투자에서는 돈이 몰려서 밸류에이션이 올라가고, 정치에서는 지지가 몰려서 여론이 굳어지고, 협상에서는 대안이 쌓여서 조건을 내가 정하게 되고, 연애에서는 호감이 쌓여서 서툰 말도 매력이 됩니다.
근데 기세가 꺾이는 순간, 같은 구조가 정확히 반대로 작동해요.
정치에서는 지지율이 오를 때는 실수도 "과감한 리더십"이 되고, 지지율이 떨어지면 같은 행동이 "독선"이 됩니다.
협상에서는 대안이 있는 쪽이 기세를 갖고, 기세가 있는 쪽이 조건을 정해요.
연애에서는 호감이 쌓이는 국면에서는 서툰 말도 매력이 되지만, 기세가 꺾이면 같은 말이 부담이 됩니다.
내용은 달라진 게 없어요. 기세만 달라진 겁니다.
그래서, 능력 좋고, 확신 있고, 스토리 잘 짜고, 행동력까지 있는 상대와 맞서야 할 때 가장 위험한 선택은 상대의 기세가 작동하는 전장에서 정면으로 싸우는 거예요.
상대의 네러티브가 자기 강화 사이클을 타고 있는 판에서 맞붙으면, 실력과 무관하게 갈려 나갑니다. "저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라는 분위기가 형성된 순간, 내가 뭘 해도 역풍으로 작용하거든요.
그럴 때 해야 할 건 전장을 바꾸는 겁니다. 상대의 기세가 작동하지 않는 판으로 옮기는 것. 상대의 네러티브가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 상대의 자기 강화 사이클이 닿지 않는 곳, 내 네러티브가 새로운 기세를 만들 수 있는 지형으로 가는 거예요.
핵심은 기세는 키워 나갈 수는 있는데 이걸 타고난 기질의 몇 배로 뻥튀기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나마 네러티브는 설계할 수 있어요. 하지만 기세는 타이밍과 실행이 맞아떨어질 때 생기는 결과물이지, 의지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진짜 실력은 두 가지예요. 기세가 올 때 망설이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 그리고 기세가 없을 때 상대의 판에서 버티는 게 아니라, 내 판을 새로 까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