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정하지 않은 것들로 살아간다〉
2장. 파문
윤아는 며칠 동안 핸드폰 알림을 꺼두고 살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냥, 화면이 켜질 때마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게 싫었다.
300만 원과 100만 원.
통장에 찍힌 숫자는 여전히 거기 있었고,
윤아는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확인하는 순간, 이 돈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윤아는 밖으로 나갔다.
집에 있으면 생각이 많아졌고,
생각이 많아지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
별 기대 없이 넣었던 자리였다.
이력서는 이미 너무 닳아 있었고,
윤아 자신도 더 이상 자신을 팔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경력 공백이 좀 있네요.”
면접관이 말했다.
비난도, 호기심도 아닌 목소리였다.
그저 사실을 읽어주는 사람의 톤.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면접관이 먼저 말을 이었다.
“요즘엔 다들 그래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위로도, 포기도 아닌 말.
단지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선언 같았다.
카페를 나와서 윤아는 버스를 탔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며칠 전만 해도 이 손으로
‘예’를 눌렀다.
아무 설명도 없이,
아무 질문도 없이.
그날 이후,
윤아의 삶은 겉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
지수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면접 결과도 묻지 않았다.
대신,
윤아가 먼저 지수를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지하철에서 비슷한 머리 길이를 볼 때,
편의점에서 혼자 캔맥주를 고를 때,
괜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넣을 때.
윤아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이름을 붙이려다 포기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태호를 다시 만난 건 우연이었다.
대학 때 같은 조였고,
졸업 후엔 각자 바쁘다는 이유로 연락이 끊겼던 사이.
편의점 앞에서였다.
태호는 야간 근무 조끼를 입고 있었고,
윤아는 그 조끼가 왜 그렇게 낯설게 보였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윤아 맞지?”
태호가 먼저 알아봤다.
눈 밑에 그늘이 깊었다.
“여기서 뭐 해?”
윤아가 물었다.
“알바.”
태호는 웃었다.
“원래는 잠깐만 하려고 했는데,
잠깐이 길어지네.”
그 말도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둘은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캔커피를 마셨다.
별 얘기는 하지 않았다.
각자의 ‘아직’과 ‘잠깐’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 사이였다.
“요즘은 뭐 해?”
태호가 물었다.
윤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하고 말을 흐렸다.
그 순간,
윤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꺼두지 않았던 단 하나의 알림.
은행 앱이었다.
윤아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가렸다.
태호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너 괜찮아 보여서.”
태호가 말했다.
“그냥, 예전보다.”
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아 보인다는 말이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
그날 밤,
윤아는 처음으로 돈을 썼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옷 한 벌.
딱히 마음에 들지도,
딱히 비싸지도 않은.
결제가 완료되는 순간,
윤아는 숨을 참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자도 없었고,
알림도 없었고,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게 더 불안했다.
—
며칠 뒤,
태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요즘 야간 계속 들어가게 됐어
돈 좀 모으려고
윤아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계속’과 ‘좀’ 사이의 거리.
그게 너무 멀어 보였다.
윤아는 답장을 쓰다 지웠다.
괜히 조언하는 말,
괜히 걱정하는 말,
괜히 책임지는 말이 될까 봐.
그때,
핸드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이번엔 은행도,
지인도 아니었다.
화면 하단에,
아주 짧은 문장이 떠 있었다.
[다음 파문은 준비 중입니다.]
윤아는 알았다.
이제부터는
‘선택’이 먼저 오지 않는다는 걸.
먼저 무언가가 흔들리고,
그 다음에야
묻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그 질문은
아마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향해 있을 거라는 걸.
〈우리는 결정하지 않은 것들로 살아간다〉
1장. 도착
윤아는 그날도 통장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았기 때문이다.
줄어들 뿐, 늘지는 않는다는 걸.
취업 준비를 시작한 지 정확히 열다섯 달째였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는 습관은 이미 버렸다.
원서 접수, 불합격 메일, 다음 공고.
시간은 반복되었고, 윤아는 그 반복 속에서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방은 원룸치고는 넓었지만
삶이 넓어 보인 적은 없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빛은
언제나 윤아를 비켜가듯 바닥에만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도 아니었다.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화면이 스스로 깨어난 것처럼,
알림이 ‘존재했다’.
번호가 없었다.
저장되지 않은 발신자조차 아니었다.
그저 공백.
[선택이 도착했습니다.]
윤아는 코웃음을 쳤다.
요즘 스팸도 참 열심이네.
지우려는 순간,
문장이 하나 더 나타났다.
지금 ‘예’를 선택하면
300만 원이 입금됩니다.
조건은 묻지 않습니다.
윤아의 손이 멈췄다.
조건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
이런 문장은
사람을 설득하려고 쓰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윤아는 은행 앱을 켰다.
늘 보던 숫자.
월세와 카드값을 제외하면
남은 건 ‘버티기’라는 단어 하나뿐인 잔액.
그때 다시 문자가 왔다.
남은 시간 00:59
초가 줄어들고 있었다.
윤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기다려주는 제안이 아니었다.
고민을 허락하지 않는 종류의 선택.
‘예’를 누르는 데
0.3초도 걸리지 않았다.
—
알림음이 울렸다.
입금 3,000,000원.
윤아는 숨을 멈췄다.
통장을 새로고침했다.
다시 한 번.
그리고 또.
숫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말이라면 이렇게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기쁨보다 늦게 도착했다.
“이상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군가 방 안에 있는 것처럼
혼잣말이 낮게 흘러나왔다.
그날 저녁, 윤아는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가격표를 보지 않고 물건을 골랐다.
맥주 두 캔, 즉석 파스타,
그리고 사치처럼 케이크 하나.
계산대 앞에서
괜히 핸드폰을 쥐었다.
다시 문자가 와 있을까 봐.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윤아는 동기 지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어제 뭐 했어?”
지수의 목소리는
묘하게 갈라져 있었다.
“집에 있었지. 왜?”
“아니… 그냥.
너 이름이 자꾸 떠.”
“뭐가 떠.”
“모르겠어.
면접관이 갑자기 너 얘기를 하더라.”
윤아는 웃었다.
웃어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웃었다.
“좋은 얘기였어?”
“그게…
‘선택의 기준이 명확한 지원자’라는데
그게 왜 너인지 모르겠어.”
통화가 끝난 뒤,
윤아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선택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엔 시간 표시가 없었다.
질문 하나만 제시됩니다.
지수의 면접 결과는
‘좋음’으로 남길까요,
‘보통’으로 남길까요.
윤아의 손이 떨렸다.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이 걸린 선택이었다.
‘보통’을 선택해도
지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좋음’을 선택하면
확률은 확실히 바뀐다.
문자가 한 줄 더 추가됐다.
선택 결과는
선택자에게만 영향을 줍니다.
윤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문득
어제 케이크를 고르던 자신이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책임 없이.
이번엔 달랐다.
윤아는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선택을 미뤘다.
그 순간,
문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입금 알림이 울렸다.
입금 1,000,000원.
윤아는 알았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이미 하나의 선택이라는 걸.
그날 밤,
윤아는 처음으로
잠들기 전에 통장을 덮지 못했다.
숫자보다 무서운 건
다음 선택이
이미 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